대법원 판결상 사이비 종교로 판정받지 않았지만 명백한 '사이비 종교' 로 보는 시각이 있으며 제일 중요한 건 사이비 종교 여부를 떠나 피해자들이 여럿 존재한다는 것이다. 법원에서 교주 김기순에게 확정한 혐의는 조세포탈, 횡령 등이다. 교주는 김기순이라는 자로 1940년 11월 1일(음력) 경상남도 현 부산광역시) 태생이다. (현재 82세) 교주가 되기 전엔 평범한 주부였으며, 1978년 전라북도 이리시(현 익산시)의 '주현교회'라는 사이비 종교에서 신앙 생활을 하였다. 주현교회는 이교부라는 사람이 이끄는 교회로 신도들에게 머리를 밀게 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삭발교'라는 이름으로도 불렸습니다.
그 기이한 별칭에 걸맞게 주현교회에서 일어난 일들도 참으로 기이하기 그지없었다. 교인들을 폭행하는 것은 물론, 명색이 교회라는 건물 안에서 예배 중에 신도들과 함께 천국으로 가자면서 옷을 벗고 껴안고 춤추는 나체 댄스 사건을 일으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은 것이다. 이교부는 당시 "어렸을 적 다니던 교회의 목사를 본받고자 특유의 스님 같은 차림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나체 춤을 춘 것으로 물의를 빚으면서 말 그대로 망신을 당했습니다.
거기에 충고하러 온 동료 목사를 폭행하는 사건을 일으킨 것이 결정적인 사유가 되어 구속되었다. 그리고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감옥에서 지내게 되었고, 1981년에 출소한 후 주현교회를 해산하였다. 김기순은 1982년 경기도 이천군 대월면 대대리, 도리리 일대의 땅 4천 평 남짓을 구입해 '아가농장'이라는 것을 세워 신도들을 모아 아가동산이라는 종교를 만들었다. 이때 주현교회의 해산으로 갈 곳이 없어진 이교부의 신도들까지 빼내면서 덩치를 불려 나갔다.
이런 설립 과정에서 김기순은 멀쩡히 살아 있는 이교부의 영혼을 자기가 계승했다는 주장까지 하면서 자신이 이교부의 진짜 후계자라고 자처하였다. 이러한 행각은 이교부의 원한을 사게 되었고 이교부가 출소한 후 과거 서로 돕고 지내던 이교부와의 사이도 원수지간이 되었다. 김기순은 '갈 곳 없는 신도들을 모아 공동체를 만들고 떡 장사, 어묵 장사, 음반 장사 등으로 땅을 샀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1982년에는 첫 수익사업체 '신나라레코드물류'를 세워 초기에는 트럭으로 다른 음반점에 카세트 등 음반을 팔다가 1984년 서울 종로3가에 자체 매장을 처음 연 후 특유의 가격파괴 전략을 세워 광속으로 음반도매업계를 장악했다. 또한 1992년에는 킹레코드를 설립하고 같은 해엔 하나레코드(대전), 1993년에는 명반레코드(인천) 등을 세우기도 했다. 김기순은 1982년에 '아가동산'이라는 종교를 만들기 위해 경기도 이천군 대월면 대대리, 도리리 일대의 땅 4천 평 남짓을 구입하고, 주현교회의 해산으로 집 없어진 이교부의 신도들도 모아서 덩치를 불렸습니다.
그리고 김기순은 멀쩡한 이교부의 영혼을 계승했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이교부의 진짜 후계자라고 자처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이교부와의 사이는 악화되었다. 그리고 김기순은 '갈 곳 없는 신도들을 모아 공동체를 만들고 떡 장사, 어묵 장사, 음반 장사 등으로 땅을 샀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1982년에는 '신나라레코드물류'라는 첫 수익사업체를 세워서 트럭으로 다른 음반점에 카세트 등 음반을 팔았으며, 1984년에는 서울 종로3가에 자체 매장을 처음 오픈하고, 가격파괴 전략으로 음반도매업계를 장악했습니다.
또한 1992년에는 '킹레코드'를 설립하고, 같은 해에는 '하나레코드'(대전)와 1993년에는 '명반레코드'(인천)도 설립하였다. 이 문장은 교주 김기순이 이끌던 아가동산 사이비 종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김기순은 '아가야'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대신하여 찬송가에서 예수를 치환하고, '아가야 법'이라는 상상적인 법을 만들어 신도들을 현혹했습니다. 이 종교는 아가농장이라는 노동착취형 플랜테이션 농장을 운영하여, 신도들은 낮은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CD 및 테이프를 만들며 일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폭행, 살인, 암매장을 당한 사람도 있었고, 신나라네이처팜이라는 이름으로 이천시 도리리 일대에 존재하며, 이곳에서는 외부에서 파는 채소에 독이 들어있다는 등의 거짓 주장으로 신도들을 현혹시켰습니다. 1998년 대법원 판결에서는 폭행과 살해 부분이 무혐의로 밝혀졌지만, 실제로는 폭행과 살인이 있었는지 여전히 의심스러운 상황입니다.
특히 이곳에서 신도 3명을 살해한 것이 발각되었는데 1987년 8월 14일 밤 9시에는 7세 아동 최낙원 군이 교주 김기순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돼지우리에서 신도들이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며 1주일 동안 굶기고 폭행해 죽게 했는데 이때 여러명이 돌아가면서 몇 대씩 때리고 나오는 방식을 사용해 실제로 아동에게 자신들이 가하는 폭력의 수위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1988년 1월 2일 정오에 과수원 관리책임자이던 윤모 씨도 교주의 말을 잘 안 듣는다며 살해당했으며 11월 21세 여성 강모 씨는 '교주의 아들을 현혹시켜 교리를 어지렵혔다'는 명목으로 창고로 끌려가 부모에게 따귀를 맞은 후 여러 신도들의 각목에 맞아 타살당했으며 교단 측은 '가출'로 처리했습니다.
특히 사망자 윤씨의 아들이 이천경찰서에 진정서를 냈으나 아내가 "남편은 음독 자살했다"고 주장해서 수사가 안 됐고, 병원 의사들도 사체검안 당시 최 군의 사인을 '선천성 심장질환', 윤씨는 앞서 말했듯 '음독 자살' 등으로 처리했다. 이렇듯 경찰의 수사 비협조와 부실한 사체검안, 유족들의 비협조 등이 수년간 그 사건을 은폐했던 것이다. 또한 목격자들도 폭행 광경을 봤지만 실제 살해 과정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기사) 아가동산은 신나라라는 이름의 종교단체로, 김기순이 교주로 선언하고 신도들을 지배하는 사이비 종교였습니다.
이 곳에서는 김기순이 자신을 '아가야'라고 불러야 하며, 그를 우상으로 삼아야만 했습니다. 김기순은 교리로 자신이 신이며, 신도들은 이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교리로 인해 신도들은 폭력적인 행동도 가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폭행 및 살인, 암매장을 당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한, 김기순은 지상천국을 세운다며, 신도들의 재산 50억 원 정도를 강제로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김기순은 신도들에게 일을 강요하고, 가족과 부부 사이의 교류를 금지하며, 신문, 텔레비전, 외부 출입 등을 모두 금지했다. 또한, 병역을 고의로 면탈하도록 종용했으며, 이를 법적으로 처벌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반인륜적 착취 끝에 6년 만에 4천 평이었던 땅이 13만 평으로 대략 32배나 늘어났고, 1993년에는 '신아영농조합법인'을 세워 농림수산부로부터 '첨단기술농업시범단지'로 지정되어 1994년 유리하우스 등을 세우며 정부와 경기도청 등으로부터 국고 23억 5천여만원을 지원받았다.
당연하지만 악행과 고혈 위에 쌓은 그 권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1995년 8월에 아가동산 이탈 주민들이 교단 측의 탈세와 사기 등 온갖 비리에 대해 경찰에 진정서를 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20일만에 내사 종결처분을 내 버렸다. 이에 이탈 주민들은 1996년 7월 15일 경기도청에 같은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하자 이천경찰서가 재수사에 나섰고 12월 1일 수원지방검찰청 여주지청은 이천경찰서로부터 아가동산 관련 수사자료를 넘겨받고서 검-경 합동수사에 돌입해 7일에는 김기순과 관련자 6명에 대해 일부 주민 살해 및 사기 등의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김기순만 영장이 발부됐습니다.
1997년 4월 28일 김기순에게는 사형을 구형했으며, 나머지 간부들에게는 중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그 사이 1996년 노동법 날치기, 한보 사태, 김현철 스캔들, 황장엽 망명 사건 등 숱한 사회적 이슈들이 잇따라 터지며 아가동산은 점차 잊혔고 그해 1월 3일, 증거보전 청구심과 21일 검찰 조서에서 당시 신도 사체 암매장 혐의자였던 굴삭기 기사 윤씨가 진술을 번복한 사실이 밝혀져 검찰의 무리수 의혹이 퍼졌다.
5살의 피해자 최모 군에 대해서도 최 군의 친모까지 현장에서 진술을 번복해 "아이는 살해당하지 않고 선천성 심장병으로 죽었다"며 교주를 감싸는 바람에 피해 사실을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5월 20일, 주범 김기순은 수원지법 여주지원에서 조세 포탈, 횡령 등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4년과 벌금 56억원을 선고받았고 신도 김씨 외 5명의 살해 혐의는 무죄, 신나라유통 대표이사 강활모에겐 징역 2년 6개월 및 벌금 60억원 등을 각각 선고했습니다.
이들 중 김기순은 10월 10일에 보증금 1억원을 내는 조건 하에 보석으로 일단 석방되었다. 1심 선고 당시 재판부는 "아가동산이 순수한 협업마을에서 시작되어 김기순을 지도자로 부각시킬 때 일부 변질은 있었으나, 종교의식과 포교 활동이 없는 것으로 보아 검찰의 주장대로 '사이비종교'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는 식으로 증거재판주의에 입각해 발표했습니다.
이후 1998년 3월 3일 서울고법 항소심, 6월 23일 대법원 상고심에서도 똑같은 판결이 내려졌다. 대법원 1998. 6. 23. 선고, 98도869 판결문 전문 아가동산 사건에서 신도들의 노력을 훔쳐 세운 아가동산은 김기순이 구속되고 난 후 세력이 약해졌고 그 후 신도가 줄어들며 와해되었고, 2000년 8월 김기순은 완전히 출소하였으나 교주로써의 권력을 잃은 채 생활하고 있습니다.
신도 살해와 폭력은 검찰의 증거 부족으로 무혐의로 처리되었으나, 이에 대해 증거를 제시하는 피해자들이 여전히 있어 의심스러운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또한, 아가동산의 노동력 착취 문제와 그에 대한 처벌에 대한 비판도 존재하며, 이단대책기구와 개신교 주류 교단 등이 반발하고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검찰은 굴삭기 기사 윤씨와 일부 신도들이 주장한 유리온실 주변 부지에서 유골 발굴 작업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고, 김기순은 위증교사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지만 강씨의 유골을 발굴하려 시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고 결국 공소시효 만료로 김기순에 대한 수사가 종결되버렸습니다.
1995년 아가동산 사건 이후, 김기순은 징역 4년과 벌금 56억원을 선고받았고 일부 살인 혐의를 제외한 다른 혐의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여전히 아가동산의 피해자들은 김기순의 가벼운 처벌에 대해 분노를 표하며 여전히 불만을 가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김기순은 수감 생활을 하다가 출소 후 벌금을 완납하고 재기에 성공해 현재는 신나라레코드의 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아가동산의 피해자들은 김기순이 그간의 악행에 비해 가벼운 처벌을 받은 것도 모자라 석방 후 세상을 조롱하듯 부를 누리고 있다고 분노를 표하고 있습니다.
아가동산은 현재는 신나라네이쳐팜이라는 일반 개인 농장으로 바뀌어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신나라레코드는 아가동산의 계열사로 남아 있으며 김기순은 여전히 아가동산의 대표이사로 등록되어 있으며. 그리고 '신나라'라는 이름은 '신의 나라'라는 뜻의 아가동산의 교리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김기순은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여전히 떵떵거리며 부유하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이 있지만, 김기순은 이미 돈을 벌어서 큰 문제는 없는 상황이며, 또한 법적 처벌도 다 끝난 상황이므로 이에 대해선 더 이상 논란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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